2019년 7월,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한국을 겨냥한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우리 정부는 물론, 일본 국민도 예상치 못한 발표였다.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갈등을 지속해온 한·일 관계는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싸늘히 식었다. ‘가지 않겠다’ ‘사지 않겠다’는 국내 일본 불매운동은 불길처럼 번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이 흘렀다. 그사이 일본엔 스가 정권이 새로 들어섰고, 올해 초 취임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줄곧 한·미·일 3국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번 경색된 한·일 관계는 이후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6월 G7 정상회의 당시 합의됐던 한·일 양국 간 약식 회담이 돌연 취소되고, 최근 일본이 다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갈등이 격화되는 모양새다.
시사저널은 2년 전 아베의 수출규제 발표 직후, 역대 정부에서 주일대사를 지낸 5인을 각각 인터뷰했다. 당시 이들은 자신이 속했던 정권의 성향과 관계없이 일제히 “지금의 한·일 관계가 해방 이래 최악”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대일 외교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양국 간 갈등 국면이 장기화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2년 동안 이어진 경색 국면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 1년 이상 대일 외교를 책임졌던 주일대사들에게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향후 타개책에 대해 다시 물었다.

“소부장 손익 따지기보단 관계 개선 시급”
“일본의 목적은 실패했다. 우리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오히려 기술자립도를 높여줬다. (한국의) 대일 의존도도 많이 떨어졌다. 한·일 관계만 한껏 나쁘게 만들고, 일본이 의도한 바는 정작 이뤄지지 못했다. 손해는 일본이 더 컸다.” 문재인 정부 초반 주일대사를 지낸 이수훈 전 대사의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2일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 성과 간담회에서 “기습 공격하듯 시작된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소부장 산업의 자립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로 만들었다”며 우리가 얻은 성과를 강조했는데, 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놓은 것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주일대사를 지낸 유흥수 전 대사 역시 “일본 수입에 의존했던 소재들이 실제 많이 국산화되면서 어느 정도 자립을 갖춘 것 같긴 하다”고 평했다. 다만 “완전히 의존도가 없어진 건 아니니까 경제 교류는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라종일 전 대사(노무현 정부)는 현 정부의 성과 강조가 섣부른 공치사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그는 “아무리 경제적으로 발전한 선진국일지라도 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속이나 소재를 오롯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우리가 짧은 시간에 과연 제품의 질이나 가격 면에서 자립능력을 완벽하게 이뤄냈을까,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 일본 내 반한정서 키워”
각 정부 주일대사들이 분석한 경제적 손익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2년간의 손익 계산보다 전반적인 관계 개선을 더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지적했다. 관계가 풀리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도 손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관계가 꼬인 걸까. 대사들은 과거사 등 논쟁적 현안에 대한 현 정부 외교 방식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신각수 전 대사(이명박 정부)는 지금의 한·일 관계를 장기적으로 ‘상호 손실(lose-lose)’ 상황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더 큰 손실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사 문제에서 우리가 확실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늘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고 공세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2018년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과 이듬해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을 거치며 지금 일본은 ‘한국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있다’며 오히려 역공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났을 때, 우리가 나름의 타협안을 마련해 관계를 외교적으로 타개해야 했는데 그런 노력이 없었다. 그 결과가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결단이었다. 지금은 양국 간 신뢰 자산이 바닥났다. 뭘 해도 의심하고 음모론을 이야기한다.”
2년 전 아베의 수출규제 결정은 일본으로서도 함께 피 흘릴 수밖에 없는 특단의 조치였다. 그 밑바탕엔 일본 여론도 이 결정에 동조할 거란 아베의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만큼 당시엔 일본 내에서도 이미 반한(反韓) 정서가 컸다는 의미다. 라종일 전 대사의 분석은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이 나쁘니까 우리도 별수 없다며 내버려두는 태도는 금물이다. 양국 정부가 못한 건 서로 적대적인 여론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아베 자신이 곧 일본인 것도 아니고, 스가가 일본인 것도 아니다. 일본 국민이 곧 일본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정부는 일본 여론이 굉장히 우리에게 나빠지도록 방치했다. 한국에 대해 이해가 높고 공감하는 일본 내 전문가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잘못이고 명백한 외교 실패다.”

“한·일 모두 체면부터 챙기려는 태도 버려야”
실제 국내 반일 정서 역시 여전히 강한 것으로 파악된다. 7월13일 시사저널이 시사리서치에 의뢰해 전국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중 76.6%가 일본에 대해 현재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향후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과반인 52.1%가 ‘교류는 해야 하지만 우리의 입장을 관철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경색된 관계를 정상화하는 건 필요하지만, 자존심을 접어가며 대일 외교를 지속할 이유는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것이다.
전직 주일대사들은 그럼에도 우리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 회복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양국은 민주주의 대 반민주주의로 대치하고 있는 국제 질서에서 주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유흥수 전 대사는 “중국·러시아·북한 공산주의 세력과 한·미·일 등 민주주의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우호 관계는 절대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 때 주일대사를 지냈고,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유명환 전 대사 역시 “일본은 민주주의를 비롯해 시장경제·인권 등 우리와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다. 우리는 역사에서 직접 피해자이기 때문에 적대감이 있지만 더 큰 틀에서의 우리 국익을 고려했을 때 한·일 관계 개선은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막힌 대화의 물꼬를 서둘러 터야 한다는 얘기다. 이수훈 전 대사는 “과거사 문제와 미래를 위한 대화를 별도로 풀어나가는 ‘투트랙 전략’을 견지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 버리면 언제든 관계가 다시 꼬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신각수 전 대사는 양국 모두 ‘체면’을 챙기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유럽 순방 중 메인 일정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이었다. 미·러 관계는 한·일 관계보다 훨씬 나쁘다. 그럼에도 정상회담을 열어 상호 문제를 파악하고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한·일 양국은 체면을 과도하게 중시하고, 결과가 마땅치 않을 것 같으면 아예 만나지 않는다. 문제를 키우고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드는 자세다. 이번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상끼리 마주 앉아 문제 해결에 대한 공통 의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